산사(山寺)의 하루.
산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난 맑고 투명한 햇 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가을을 닮아있는 날, 낯선 곳을 찾아가는 설 렘으로 길을 나섰다. 산 과 들 짙은 초록의 향연을 감상하며 막힘 없는 고속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려 "단성"을 빠져 나와 국도에 접어 들었다. 스님께서 보내주신 약도를 보며 갈림길마다 방향을 잡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지나가는 마을 주민들께 묻고 또 물어가며 찾 아드는 지리산 남쪽 끝자락, 다락 논에는 벼들이 이삭을 품고 통통 하게 몸을 불려 가지런하게 자라고있고, 붉게 익어 가는 고추가 늦 여름 햇살에 더 없이 고운 농로(農路) 길을 지나 성짓골 품에 안긴 산사 입구에 닿았다. 차에서 내려서니 바람 한 자락 숲 향 가득 묻혀 훅~하니 불어온다. 조심스럽게 풀 섶 길을 올라가니 양품에 계곡을 안고 있는 반듯한 산사가 나타난다. 인기척을 하고 살짝 문 을 당겨 열었다. 스님은 계시지 않고 바람이 따라 들어와 반겨 준 다. 출발하기 전 전화 드렸을 때 초막으로 기도하러 가신다던 말씀 이 생각났다. 산사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서있는 대나무 숲길을 맑 고 청아한 물소리와, 산새들 소리를 들으며 무작정 오르니 황토의 초막이 고즈넉하니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살짝 문을 열었다. 삐~ 거~덕 소리와 함께 은은히 풍겨오는 흙 향이 대(竹)향과 어우러진 다. 목청을 가다듬고 스님!!~~하고 조심스럽게 불러 봤다. 메아리만 첩첩 산을 돌아 대답할 뿐이다. 댓잎에 쏟아지는 햇살이 금빛으로 어룽지는 마당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산수화 같은 초막의 풍 경을 마음 가득히 담고, 쫄쫄쫄 흐르는 작은 계곡 물에 손을 씻어 더위를 식혔다. 시간도 멈추어 버린 듯한 초막, 단 하루 밤만이라도 거(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려 남편과 도란도란 이야 기를 나누며 내려오는데 스님이 올라오신다. 처음 뵙지만 그리 낯 설지 않음과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고 산사로 돌아왔다.
해발 430여 높이쯤 자리잡고 있는 산사, 활짝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오는 자연풍에 서늘함이 감돈다. 스님이 내어오신 과일을 마주 하고 삶과 문학에 대한 담소를 나누었다. 자연과 일체가 되는 삶, 순수한 인간의 감정을 서정시(抒情詩)를 통하여 회복해야 함을 강 조하신다. 그리고는 스님의 섬세한 시정(詩情)을 엿볼 수 있는 자화 상 같은 "山 居"을 암송하시는 모습은 꾸미지 않은 자연과 너무도 닮아 있다. 물질의 풍요가 넘쳐나는 세상, 정신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가꾸며 지혜롭게 살아가라 주시는 말씀 "말을 아껴라" 하신다. "침묵하는 법을 배워라" 하신다. 그리 고 "글 한편을 쓰더라도 정말 좋은 글을 써라, 일생에 단 몇 편의 글을 남길지라도 시대를 초월해서 읽어도 가슴을 울리는 좋은 글, 그런 글을 써라" 하신다. 마음에 양식으로 쌓여 삶의 뼈가 되고 살 이 되는 말씀을 심중에 새기고, 스님이 평소에는 걸어서 가신다는 산책길을 따라 이웃마을에 있는 음식점을 향하여 길을 나섰다. 산 허리를 가르고 있는 자동차 한 대 간신히 지나 갈 수 있는 길, 한 길 넘게 자란 풀들이 유리창을 기웃거리며 함께 가자 손을 잡는다. 굽이굽이 몇 굽이를 돌았는지 모른다. 깎아지른 낭떠러지 길을 돌 고, 솔 향기 가득한 숲길도 돌고, 돌고 돌아 나타난 곳은 청학동 마 을이다.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비켜난 댕기 동자(童子)들의 글 읽는 소리만 낭랑히 들려오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순수한 자연과 어울 리지 않는 문명의 이기가 늘어선 화려한 도심 뒷골목이 이곳에도 있었다. 마치 어느 관광지의 한 모습을 보는 듯 하여 괜스레 씁쓸 해진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다시 산길을 따라 돌아왔다. 휘정 휘정 걷는 걸음으로 두어 시간이 넘게 걸리신다는 산책길, 한끼의 공양 을 위함이 아닌 시심과 불심을 기르고 닦으시며 번뇌와 망상을 가 라앉히는 마음의길 임을 알았다.
어둠이 내린 산사, 고즈넉한 적막감이 저녁밥 짖는 연기처럼 내려 앉았다. 처음 찾아온 나그네의 불편함을 배려해 주심인지 스님께서 는 우리 부부에게 산사를 남겨주시고, 낮에 잠깐 보았던 산 속 초 막으로 선(禪)의 깨우침 찾아 손전등 하나 들고 홀연히 떠나셨다. 인적 없는 산사! 두 사람 숨소리만 들린다. 온전한 우리 것이 되어 버린 성짓골,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웠다. 밤하늘 별들이 하나씩 하 나씩 빛을 내기 시작한다. 어디서 소식을 듣고 왔는지 반딧불이 파 르스름한 불빛을 꽁무니에 매단 체 주위를 맴돌며 축하 공연을 한 다. 풀벌레들 이에 질세라 골짜기를 흔들며 축가를 부른다. 아!~ 참 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연과 일체감이다. 언제부터 밤하늘에 별 들이 저토록 많았던가?, 엑스포 과학관 천체관 속에서 보았던 별들 의 무리를 옮겨 놓은 듯 했다. 아무리 쳐다봐도 질리지 않는 별들 의 축제, 어떤 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어떤 별은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다니고.... 참으로 많은 별과 유성들의 축제다. 정말이지 언제 이렇게 많은 별들을 보았던가?, 까마득한 어린 날 마당에 펼쳐놓은 멍석에서 엄마 무릎을 베고 보았던 것 같은데... 무엇이 그리 바빠 서 이런 별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 왔는지...산골에 공기는 싸늘하게 체온을 식히고, 추위마저 느끼게 한다. 여행길 피곤함이 밀물처럼 밀려와 방에 들었다. 산사의 저녁을 아시는 스님께서 미 리 불을 지펴 놓으신 온기가 정처럼 따끈하다. 잠자리에 누웠다. 마 주하는 숨소리만 적막 속에 들린다. 소음에 익숙해진 귀에는 사람 의 소리인 듯 하기도 하고, 자동차의 소음인 듯도 한 분간하기 어 려운 윙~하는 울림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익숙 하지 않은 고요에 외려 잠이 오지 않는다. 산중에 느지막이 떠 오 른 달빛이 창문 가득 빛을 뿌린다. 까만 어둠, 칠흑 같은 어둠을 생 각했는데 외려 더 은은한 빛과 고요에 젖어드는 밤, 이런저런 생각 에 잠겨있다 살짝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귓전에 와 닿는 산새들의 지저귐 소리에 눈을 떴다. 성짓골 어둠을 깨우며 푸르스름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잊혀지지 않을 밤, 고 요가 고여있던 산사에 멈추어진 시계바늘을 돌리며 골짜기의 시간 을 깨우듯 무상무념에 잠긴 내 의식을 깨우려 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손으로 만지면 푸른 물이 묻어날 것 같은 하늘에 목화솜 같은 구름이 온갖 형상을 그려내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멈춘 듯 흐르 는 구름이 참솔나무 가지 위에 걸터앉아 쉬어 가는 이 산자락, 그 품에서 대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시심(詩心)과 불심(佛心)을 닦는 스님의 삶이 있는 산사, 그리고 초막, 내 어떤 날 하루 잠깐 거(居)하였다 하여 어찌 스님의 깊은 혜안과 정신세계를 알 수 있 을까 마는, 온전한 자연 속에 살아가는 삶 하나만으로도 득도의 꽃 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산사에 곱게 번지는 햇살 등에 지고, 더 쉬었다 가라고 권유하시는 마음 뿌리치고, 스님의 따 스한 정과 배려와 적막감에 잠기었던 행복한 시간 정리하여 길을 나섰다.
여행길에서의 잊지 못할 하루 밤. 성짓골의 고즈넉한 풍경을 마음속에 넣고 길을 나서며 생각해 본 다. 우리네 사는 것도 여행이 아닐까? 하고, 이승에 와서 잠시 살다 가는 여행. 만남도 헤어짐도 자유로운 여행자처럼 무거운 짐 벗어 놓고 욕심에 메이지 않고 홀가분하게 살다 가면 좋을 것을. 세상살 이 늘 시소 타기 같은 변화무쌍한 삶에서 올라가는 순간도 잠깐, 내려오는 순간도 찰라 인데, 부대끼며 아등바등 살아지는 것은 뭔 지.....삶의 여정 길에서 좋은 인연, 아름다운 인연으로 찾아왔던 곳, 햇살도 내려앉아 깨우침을 얻다 지쳐 잠이 들면 하늘엔 무수히 많 은 별들의 잔치가 벌어지는 곳, 일상에 찌들고 마음 할퀴어질 때 찾아가 안식을 얻고 싶은 산사에 내 마음 한 자락 남겨놓고 특별한 하루를 가슴속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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