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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마음의 보석을 닦다

by 흥자 2004. 3. 2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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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눈부신 햇살, 움터나는 잎들과 꽃들로 강산이 들썩거리고, 때늦은 폭설에 무너져 내린 가슴
들 위로 대통령 탄핵이라는 강풍은 3월의 동장군을 불러들여 민심을 얼어붙게 하는 혼란스
런 3월.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14년 동안 해왔던 일을 접고 집에서 휴식을 한지도 벌써 세 달째 접어
든다.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선뜻 시작도 못하고
살피고 있는 중이라 마음 한 귀퉁이가 늘 묵직하다.
그래도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여유와 아이들 방학이 겹쳐 비교적 평안하게 2개월
을 보냈는데, 방학도 끝나고 가족들 모두 저마다 위치를 찾아 썰물처럼 집안을 빠져나가고
나니, 홀로 남는 고독한 섬이 되어 갔다.
날마다 가까운 산을 찾아 산책을 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하려 해도 생각의 한 모퉁이에는
'무엇인가 해야하는데...'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산책을 하고 오다가 뭐 좋은 정보 없을까...하는 마음에 정보지 쌓여 있는 곳에서 두툼한 것
으로 골라 잉크냄새 가득 묻은 한 권을 들고 왔다.

정보지를 펼쳤다.
한 면씩 젖혀가며 살피다가 사람을 채용하고, 직장을 구한다는 온갖 직업의 세계가 깨알처
럼 박힌 글씨들을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당신의 미래를 책임지겠습니다. 모집직종 : 사무·행정, 나이 25
세∼45세, 준비서류 : 주민등록등본, 이력서 내사 요망함..."
한참을 망설임 끝에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그래 용기한번 내보는 거지 뭐...아
니면 말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저∼∼구인 광고 보고... 전화 드렸는데요"
"네∼∼지금 모집 중입니다"
"그런데 주∼ 주부인데...정말 '사무·행정'직 모집하는 것 맞나요?"
"네∼∼ 맞습니다. 서류 준비 하셔서 한번 방문해 주세요"
"예∼∼위치는 요?"
"네∼∼○백화점 아시죠?...백화점 뒤 ○빌딩 3층입니다"
"예...그럼 찾아 가 뵐께요"
현재 살고 있는 집과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아주 가까운 곳이다.

서류를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새롭게 신축된 빌딩, 외벽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상호가 보이지 않는다, 내부를 기웃거려 보
니 조그맣게 붙은 간판이 보인다, 더듬더듬 계단을 올라갔다.
"서류 접수하러 왔는데요",
말쑥한 차림의 젊은 분이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리곤 "면접장"라고 문패가 달린 방을 안내하고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심호흡한번 하고 둘러보고 있는데 "똑똑똑" 노크소리를 내며 면접관이 들어왔다.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가족관계와 이력을 이야기하고, 지원하게된 동기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첫 회사의 분위기를 물어 봤다.
"왜 '면접장'이라고 쓰인 문들이 몇 개씩이나 있고, 왠지 전체적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혹시∼∼'????' 몇 개 붙는다 했더니, 활동적인 회사라서 그렇다 한다.
그리고 또한 "젊은 구직자들도 많은데 비교적 나이가 많은 '주부'에게도 자격을 주는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주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높다 보니 젊은 사람들과 불협화음이 일어
나고, 숫자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 마음까지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필
요하며, 여직원이 이젠 더 이상 사무실의 꽃이 아니란다.
그런 면에서 자신들의 회사는 기회의 폭을 넓혀주고 남·여 차별을 철폐하는 선진 경영을
하는 곳이라고 장황하게 설명을 하며, 다음날 전화로 합격여부를 통고하겠다 한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 내 모습이 초라해지고,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이 횡∼하니 몰아쳤다.
그리곤 시간이 흐르고 "축하합니다 1차 합격하셨습니다, 내일 오후 2시에 2차 면접이 있습
니다"라는 전화 통고를 받고 다음날 2차 면접을 보고, 다시 "축하합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셨습니다. 내일 9시 10분까지 단정한 차림으로 회사로 오세요".
'아직은 그래도 사회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구나'하는 마음에 감사함과 함께 자못 떨
렸다.

3월의 바람은 유난히도 부드럽고 꽃들은 화사하게 웃음을 웃고 있는 길, 활기찬 아침을 열
며 분주히 준비를 하고 출근을 했다.
한치는 떠 있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삼일 동안은 사전교육
이 있다며 강의실로 안내를 한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뜻 보기에 이십 명 정도가 벌써 와서 앉아 있다.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아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한 명 두 명 더해지더니 강의실 의자
가 빈곳이 없다.
이내 회사측 관계자가 나와서 개별적 교육을 할 수 없으니 여러 부서가 공동으로 사전교육
을 받는 것이며 첫째 날 "환경", 둘째 날 "마케팅", 셋째 날 "회사전반"에 관한 교육을 오전
중으로 만 한단다.
이내 강사가 화려한 프로필과 함께 소개되었다.
생명의 근원인 물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수질이 오염되면 인체에 어떠한 폐해를 가져오는 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자료와 그
폐해를 방송했던 방송자료까지 준비하여 마시는 물에 대한 경각심을 재고하게 한다.
밥을 굶고는 최대 100일까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도 물을 먹지 않고는 7일 이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다며 먹는 물의 중요성을 몇 번씩 강조한다.
또한 대기 오염도 이에 못지 않게 심각하며 그 폐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심각
한지를 자료를 보여주며 강조한다.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인간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두말하면 뭐하랴.
늘 알고 있으면서도 생활의 편리 때문에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파괴해 가는 현실인 것을,
고개를 끄덕이며 강사의 말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덧 교육이 끝이 났다.
이렇게 첫날의 어색함과 떨림을 뒤로 두고 둘째 날을 맞이하였다.
"마케팅",
21세기는 적극적인 "마케팅" 시대라 한다.
자기 생각의 지배에서 벗어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찾아가는 '마케팅', 앉아서 기회가 주어지
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 생각이 튀고, 발로 뛰는, 나를 알리고, 회사를 알리는
그리하여 성공을 향하여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 한다.
긍정적 사고, 적극적인 행동,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 삶을 바꾸는 대 원칙이란다.
잠재된 나를 깨우는 자명종 같은 이야기들이 뇌리 속을 가득 채우고 가슴을 두드렸다.
와!∼ 괜찮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둘째 날 교육을 마쳤다.
이렇게 환경의 중요성과 열려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장법인 인데...그러면서도 수시로 구
인을 하고, 지원분야가 같은 여러 동료의 이야기를 듣고, 교육을 받으면서도 "혹시..???"라는
꼬리표를 들고 돌아 왔다.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락할 것이 있어서 아침에 전화를 했더니 통화가 안되더라는 것이다.
무엇 하는데 그렇게 바쁘냐고.
이래 저래해서 어느 회사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지인의 말이 의외의 반응이다.
"바보 아냐?, 순∼진∼해 빠지∼∼ 긴"
"왜??"
"거기 '다단계' 아니 야, '네트워크 마케팅' 말이야"
"아니, 아니라고 하던데....그래도 이틀 교육받았으니까 그냥 받아 볼래, 집에서 할 일 도 없
는데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한 참을 너스레를 떨고 통화를 끝냈다.
뭔가 둔탁한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으로 셋째 날 교육에 임했다.

"회사 전반"에 관한 제도 이야기를 하는데 확실한 조목조목이 아닌, 회사의 방침을 믿고 따
르면 성공을 확신할 수 있다는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로 마쳤다. 그리곤 부서를 배치하고,
직속 상관을 찾아 사무실로 안내를 한다.
백여 평쯤 되는 넓은 사무실, 전면에는 커다란 칠판이 걸려 있고, 의자와 책상들이 빼곡하
며, 앰프와 마이크시설이 노래방을 방불케 한다.
대강 눈으로 훑어 봤다. 업무용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컴퓨터가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낯선 사무실이라서 인가?",
아니면 업무를 "수 작업으로 하나?",
선진경영으로 앞서가는 회사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는데...설마?,
다시 천천히 앞에서부터 살펴보니 바로 내가 서 있는 옆에 세 대의 컴퓨터가 있고, 함께 일
을 해야 할 "지부장" 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의 명패가 보인다.
인사를 하며 빈 의자에 앉았다.
교육받느라고 수고 많으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일 아침부터는 정식 출근이니 시간 엄수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삼일간의 교육을 마쳤다.

낯선 사무실 분위기, 자꾸만 많아지는 물음표를 달고 정식으로 출근을 했다.
사원들로 넓은 사무실이 가득 메워지고, 왁자지껄 무슨 시장판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더니
"본부장"이라는 명패를 단 사람이 신입사원 환영회를 한다며 마이크를 잡아든다.
귀청을 울리는 "환영합니다" 와 함께 신입사원이 소개되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판매)
한 생산을 "축하한다"는 축하의 말들이 천둥처럼 사무실을 울렸다.
지존(至尊)을 추앙하는 듯한 박수 갈채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형용사의 남발에 정신이 몽롱
해 졌다.
이렇게 시작된 아침 조회는 두 시간을 넘겨서야 끝이 나고, 승급제도와 급료 체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교육이 있다한다.
이제는 생각의 꼬리를 붙잡던 의문이 풀리려나 보다 하고 경청을 하는데, "지부장"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분이 들어오더니 파란 많은 자신의 이력을 펼쳐 놓고는 '1+1=2' 의 공식
이 아닌, '1+1=3' 되기도 하고, '1+1=무한대' 가 되기도 한다는 아이러니한 말을 남기고 반나
절이 지나 갔다.

점심 식사를 했다.
커피 한잔의 휴식과 함께 "지부장"의 면담이 이어지고 주어진 업무에 대한 설명을 이야기한
다.
"3개월의 수습기간이 있는데 그 때는 판촉과 함께 판매를 해야 한다, 물론 영업직은 아니지
만 회사의 사정을 알고, 영업하는 분들의 어려움을 헤아려야 사무관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초부터 알아야 한다" 라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난 분명히 '사무·행정'에 응모했는데, 그럼 본격적인 일은 언제 하느냐?", 했더니
수습기간이 끝나면 한 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요즘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서 자영하기도 힘든데 자신을 믿고 따라오
면 사무 관리나 인력관리를 배워 관리인이 되고, 그렇게 되면 대리점 하나 씩 만들어 소사
장이 되는 가는 것이다, 원래 유능한 사람은 그런 수동적인 일 보다는 능동적인 영업을 잘
한다. 그리하여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하며 달콤한 말로 회유를 하는 것이다.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 던졌다.
"내가 영업을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자영을 하죠", 했더니
슬그머니 자존심을 건드린다.
"자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집에 황금송아지 묶어 둔 것 아니지 않느냐?, 일이 필요하든
지, 돈이 필요하든지 해서 나 온 것이 아니냐, 그 나이에 일을 시켜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맙
다 해야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냐? ...".
오호라!
그랬구나.
그거였구나.
사회의 각진 모습을 보지 못한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자꾸만 좁아지는 취업난을
이용하여 얄팍한 장사 속으로 흡혈귀같이 존재하던 본색을 이제야 드러낸 것이구나.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출근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던지고 회사 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고 푸른 하늘에 흐릿한 물기가 번진다.
새 하얗게 웃고 있던 목련도, 산수유도, 푸르게 돋아나던 회양목 잎새도, 불그레한 벚꽃 몽
우리도 모두 회색 빛이다.
씁쓸한 마음이 무겁게 짓누르고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미궁의 몽환 속을 헤맨 듯
한 일주일간의 모험은 끝이 났다.
참으로 세상은 눈을 뜨고도 코를 베어 가는 세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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