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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에 관한 단상(斷想)

마음의 보석을 닦다

by 흥자 2004. 2. 2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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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에 관한 단상(斷想)

아들아이가 친구들과 장난치다 겉 옷 솔기를 찢어 가지고 왔다.

찢어진 옷 솔기를 꿰매 주려고 바느질고리에서 바늘을 꺼내 구멍에 실을 꿰는데

형체가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

눈 가까이 바늘을 대고 봐도 흐릿하기만 하다.

눈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띄우니 한결 또렷하지만 작은 구멍에 실을 꿴다는 것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몇 번을 바늘구멍을 향해 헛손질을 하다가 간신히 실을 꿰었다.

세월의 흐름에 기능을 상실해 가는 노안이 찾아온 것인지, 생활과 뗄 수 없는 모

니터를 보며 눈을 혹사시킨 탓인지, 세상 모든 모습과 색들이 밝지 못하다.

사물을 보는 눈이야 나이를 먹을 수록 흐려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겠지만, 세상을

보고 읽는 눈은 외려 더 밝아져야 하는데, 생각을 하면서 한 땀, 한 땀 옷 솔기를

맞대어 꿰맸다.

찢어져 흐트러진 옷 모양이 반듯하게 제 모습을 찾아간다.

바늘은 창조의 도구다.

마음 속 난잡하게 흩어진 생각을 모아 고뇌 속에 다듬어 주옥같은 한 편의 시(詩)

로 탄생시키는 시인처럼 저 하나로는 아무 쓸모 없는 천 조각들을 연결하여 상보,

보자기, 벽보 등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거나 새로운 형체를 구성

여 예술품으로 완성시킨다.

바늘이 조각의 천을 꿰매는 도구라면, 우리네 인생은 시간의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

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어떤 날은 슬픔으로 가득한 조각이고, 어떤 날은 기쁨으로 넘치는 일상의 조각들,

일그러지고 모난 모서리는 잘라내고 다듬어 한 겹 한 겹 더하여 하나의 작품을 만

어 가는 것이 삶의 여정이다.

그런 여정을 더듬어 가는 오늘이라는 현실은 가물가물 흐려진 눈으로 허공에 헛손

질을 하며 찾는 바늘구멍 같다.

다가갈수록 뿌옇게만 보이는 바늘구멍 같은 희망, 나아가는 방향도 모르고 막연히

앞서가는 바늘의 뒤를 따라가는 실처럼 앞을 알 수 없는 절망이다.

태풍 매미의 상처로 난도질 난 삶, 방탕한 소비로 신용불량자가 되고, 급기야는 개

인 파산자가 되어 문패와 이마에 주홍글씨를 달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 새색시 티

도 벗지 못한 어미가 듣기만 해도 겁이 나는 총을 들고 돈을 찾아 나서야 하는 현

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싸늘한 법의 테두리 속에 갇힌 어미를 망연히 기다리

고 있을 가엾은 어린아이는 무슨 죄가 있으며, 순간 이성을 잃어버린 무모함에 땅 을 치고 후회하는 어미의 눈물은 누가 닦아주어야 하는가, 자신의 생을 포기할 만큼의 절박함, 활기차게 자신의 뜻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사장되는 젊은 지식인들,

낙오자 아닌 낙오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청년들로 몸살을 앓아간다.

꿈이 사라졌다.
꿈 꿀 수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아니 죽은 삶이다.

참으로 어렵고 고단한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 그들은 다름 아닌 바로 내 형제 들의

모습, 미우나 고우나 부둥켜안고 함께 가야할 여정이다.
정말이지 혼탁한 물 속만큼이나 깊은 시름을 털어 내고, 행복하고 맑은 햇살 같은 오늘을 만들어가야 한다.

바늘과 실, 무릇 터진 옷을 깁기 위한 도구만은 아닐 것이다.

난 더러 음식을 먹고 체증이 생기면 불 위에 바늘을 달궈 식힌다음 손톱 끝을 찔러

피를 내 준다.

그러면 트림이 일고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막힌 혈을 뚫고, 더러는 떨어진 단추를 바로 달아 저 있어야할 위치에 붙들어 주는

바늘, 요즘 그런 바늘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각자의 손에 쥐어진 바늘, 두터운 옷감을 깁다가도 쉽게 부러지는 미약한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마는 작은 조각이라도 꿰매 붙여 상보를 만드는 심정으로 마음

과 마음을 깁고, 옷섶을 단정히 여며 주는 바늘이 필요한 현실이다.

참으로 많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바늘의 힘, 그 작은 힘이 필요한 세상이다.

앞서 가는 바늘의 놓임에 따라 꿰매지는 모양새 또한 달라진다.
바늘 저 혼자는 할 수 없는 창조의 작업 뒤에는 묵묵히 따라가 주는 실을 생각하며

찢어진 솔기를 꿰매다 보니 비틀어지고 단정치 못하다.

옷 솔기에 잘 못 꽂혀진 바늘을 빼서 바로잡는다.

찢어진 옷가지야 비록 아름답지 못한 흔적을 남길지라도 잘 못 꿰매면 풀어 다시

꿰맨다지만, 한번 잘못 깁어진 인생을 풀어 바로잡기에는 너무 큰 흔적으로 남을

수 있음에 신중하게 시간을 깁어 나가야겠다.

찢어진 옷을 깁듯 내 삶도 깁을 수 있다면 좋겠다.

어느 한 날 아팠던 시간들은 잘라내고, 시행착오로 일그러졌던 모습들은 도려내

고, 기쁨으로 충만했던 좋은 모습들만 모서리 맞추어 깁어 갈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 하루하루를 모아 생에 마침표를 찍을 때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 답다"

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반듯하게 깁어진 옷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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