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를 앓다.
하루라는 빈 도화지를 받아들고 각자의 위치에서 알록달록 채색해 가는 시간이다.
숨막힐 듯 간헐적 쏟아지는 기침에 훤한 낮인데도 별이 보이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신
열은 오르락내리락하며, 온 몸이 벌침에 쏘인 듯 욱씬욱씬 아파 온다.
아무래도 감기에 발목을 잡힌 것 같아 자리에 누웠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누워 있자니 햇살에 비쳐 부유(浮游)하는 미세한 먼지들이 눈앞을 어
지럽게 한다.
열려진 모든 감각은 청각으로 모아지고 혼미한 의식의 끄트머리를 배회하는 움직이는 것들
의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 온다.
짹깍이는 시계의 초침소리, 누군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소리, 창
문을 스치는 바람소리,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소리로 가득 차 있다.
무심결에 들었던 귀에 익숙했던 소리들조차도 특별한 의미로 들려온다.
몽롱해지는 의식은 창 밖 살구나무에서 울어대는 까치소리 따라 시공을 뛰어넘어 적막한 온
돌방 아랫목에 깔려 있던 이불 속으로 내 손목을 끌고 가선 눕혀 놓는다.
초등학교시절 감기에 걸리면 결석을 했다.
결석을 통해서 질서로부터 이탈된 자유를 얻었음에 불안한 생각들은 교실 모퉁이 고독한 빈
의자에 앉아 풍경을 그렸다.
지금쯤 아마 수업은 시작되었을 테고, 선생님은 호명을 부르며 나의 부재를 확인하였을 것
이다.
그리곤 출석부 내 이름자 위에 사선을 긋고 '결석'이라는 지우개로는 지울 수 없는 글씨를
써넣을 테고, 수업은 진행되었을 것이다.
세상은 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일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과, 금지된 모든 것들에
게는 사선이 그어진다는 것에 의미를 배우며 공연히 선생님과 친구들이 못내 서운하기만 했
었다.
감기는 추억의 회랑을 돌아오는 지름길이다.
자취방이 있던 허름한 뒷골목을 더듬어가기도 하고, 갈래머리 다정한 친구들 손을 잡고 수
국이 흐드러지고, 수수꽃다리 향기가 소녀들 웃음처럼 만발하던 5월의 어떤 날을 떠오르게
도 하며, 옛날에 까마득한 옛날에 내 곁을 떠나가 버린, 그리하여 이승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나게도 한다.
생활 속에서 무심히 흘러갔던 소멸한 소리들도 들려 오는 듯 하다.
기쁨에 들떴던 소리, 슬픔으로 가득했던 소리, 절망으로 가슴 무너지던 소리, 분노의 소리,
시장골목 가득 메우던 소리, 단발머리 시절 우연한 오해로 지금까지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친구의 목소리까지도 귓전에 들려 오는 듯 하다.
평소에는 들을 수 조차 없었던 추억의 소리들 속에 묻혀 있는데 폐부를 울리며 나오는 갈라
진 기침소리는 심상의 소리를 흩어 놓는다.
심상의 소리를 흩어 놓은 생의 빈 터에 거친 숨을 몰아치듯 뱉어내는 기침, 다시 신열로 끓
기 시작하는 온 몸은 불덩이가 된다.
해열제를 먹었는데도 열은 달아오른 뚝배기처럼 쉽게 내리지 않고, 두근거리는 내 맥박 소
리는 쿵쿵 울림으로 들려 온다.
이렇게 신열로 끓고 있을 때에는 어린애가 된 듯 그냥 서럽고 어머니가 그립다.
바람냄새 가득 묻혀 방문 열고 들어서며 '울 아기 열은 내렸나?' 하며 짚어주던 서늘한 손,
그 손으로 하여 내 몸에 열이 끓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어머니 손에서 느끼는 서늘함과
나의 열기, 어머니의 건강함과 나의 병, 그 반대어의 모순이 가족의 사랑과 정을 확인하는
동의어가 되는 기적을 일으켰었다.
그런 날은 씁쓸한 알약과 함께 다락 깊이 감춰둔 눈깔사탕 맛을 볼 수 있었으며, 먹기 싫다
내 젖는 고개에 노릇노릇 구워진 고등어 살점 한 점 떼어 따뜻한 밥숟가락 위에 얹어 먹여
주었다.
평소에는 투박하고 무뚝뚝하지만 마음 깊이 품어 안는 사랑으로 모순의 기적을 일으키던 어
머니의 손처럼 지금 이마를 짚어주는 손들을 만난다.
쿵~쿵~쿵 계단을 울리며 올라와 열어제치는 현관문 소리보다 먼저 뛰어들어온 아이가 '엄마
괜찮아?' 하며, 걱정 어린 말과 함께 이마를 짚어 주는 작고 서늘한 손, 17년을 함께 해온
넓적하고 투박한 손,...손. 밖에서 돌아온 가족들의 몸에서 풍기는 바람냄새 가득한 신선한
손의 촉감을 통해서 비로소 내 이마의 뜨거움을 느끼며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설목(雪木)의 가지 같은 손으로 이마를 짚어주는 의미와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며 식
은 줄 알았던 사랑을 확인하는 감기를 앓는다.
지금도 누군가는 감기에 걸릴 것이다.
글을 쓰다가, 사랑을 하다가, 장사를 하다가, 웃음을 팔다가, 노동을 하다가, 건설을 하다가,
지폐장을 세다가, 인생역전을 꿈꾸며 복권을 긁다가, 정치를 하다가, 기계를 만지다가, 지평
의 한 모퉁이를 쓸다가,... 감기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기침을 하고, 땀을 흘리고, 신열로 펄펄 끓는 앓음으로 인하여 건강의 소중함을 배우
며 사소한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잊었던 삶의 고향들을 다시 찾게 되리라.
바쁘다고 소홀히 했던 것들, 가장 소중하면서도 잊었던 내 가족들, 그리고 내 삶의 울타리가
되는 이웃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생활이 바쁘거나 삭막해 질 때 감기를 한번쯤 앓아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그리하여 무지개 쫓던 유년의 들판 가득히 널려 있던 추억과, 낡은 앨범 속에서 누렇게 빛
이 바랜 얼굴들과, 타인의 자리와 나의 자리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아마 난 감기란 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자꾸만 가슴이 황량해져 갔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고, 들판을 건너며, 빌딩의 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와 상실한 많은 소리들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얼음장 밑으로 흐르던 냇물 소리와 새들의 날개 깃 소리도 기억하지 못한
채 타인들에게서 멀어지며, 온갖 소리에서 도피하려 내 안의 성을 두텁게 쌓아 갔을 것이다.
앓는다는 것, 그것은 고통이지만 어찌 보면 삶의 냉랭한 병을 치료하는 역설의 아스피린인
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또 언젠가는 기침이 나고 신열이 끓는 앓음을 할 것이다.
그런 앓음을 위해 해열제를 준비하듯 감기에서 놓여나면 건강한 몸으로 내 가족들과 이웃들
과의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날들을 위해 웃음 가득한 아침인사를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