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를 보고
말복을 향하는 해 시계가 밤과 낮 구별 없이 열기를 쏟아내고 있다. 식을 줄 모르는 열기는 열대야에 잠 못 드는 밤의 연속이다. 방학기간인데도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갇혀버린 딸아이가 늦은 시간 학교에서 돌아 왔다. 그래도 주말이라고 평소보다 한 시간 가량 일찍 돌아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잠깐 휴식을 취하고 더위를 식힐 겸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러가자는 제안을 했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들고 슬리퍼에 헐렁한 차림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통로에 갇혀있던 바람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달려드는 바람에는 열기와 눅눅한 습기가 묻어 있다. 바람을 맞으며 슈퍼마켓을 향하던 딸아이가 엄마!~ 우리 영화나 보러 갈까? 하고 제안을 했다. 딸아이의 제안에 어떤 영화를 볼까 잠깐 고민하다 그렇지 않아도 개봉 전부터 많은 매체에서 보도 했던 '화려한 휴가', 1980년 우리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관을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영화관엔 늦은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백화점 조용한 모퉁이에 앉아 고3의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의 성적으로 지원 가능한 학교와 학과,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시간을 수학에 매달리고 있지만 결과가 기대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애태우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자신이 의도하는 학교의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성적이 더 잘 나와 줘야 하는데...노력을 해도 쉽사리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 같다. 학과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 최종에는 교차지원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토로하며 시원한 음료수와 팝콘으로 시간을 보내고 상영시간에 맞춰 객석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꿈나라에 갔을 시간이다. 1980년 광주, 생명의 환희로 눈부신 5월, 민주화를 향한 질주의 젊은 함성이 절규의 핏빛으로 솟구치던 그날의 아픔을 이야기한 영화의 첫 장면을 대했다.
숨이 막히는 듯 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 동안 광주에 살고 있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는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혼돈과 절망이 몸부림치던 내 고교시절과 맞물려 더 없이 많은 슬픔을 자아내게 했다.
‘화려한 휴가’는 5월 18일 이전의 정치적 상황 등 전반적인 시대적 흐름이 배재되고 택시기사, 간호사, 학생 등 당시 항쟁 속에 휘말린 일반시민의 시각에서 영화가 진행됐다. 광주에 사는 택시기사 민우(김상경 분)는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끔찍이 아끼는 동생 진우(이준기 분)와 단둘이 오직 진우 하나만을 바라보며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서울대 법대를 꿈꾸는 동생을 위해 형은 택시기사를 하면서 뒷바라지를 해 주는 헌신 봉사하는 순수한 청년이다. 민우는 진우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 분)를 맘에 두고 사춘기 소년 같은 구애를 펼치며 소소한 삶을 즐기며 하루하루의 소중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정치나, 민주화나, 사상적 이념은 개념조차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살벌한 일들이 벌어진다. 무고한 시민들이 무장한 시위대 진압군에게 폭행을 당하고 눈앞에서 억울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게 된다. 그들이 퇴역 장교 출신 흥수(안성기 분)를 중심으로 시민군을 결성해 진압군과 열흘간의 사투를 벌이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1980년 내 가슴 속에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이 있던 해였다.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슬픔과 사회적 우울이 내재되어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암흑기였다. 여고 2학년 꿈 많던 시절,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절망에 몸부림치던 해였다. 광주의 그날처럼 말이다.
우리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았던, 철저히 통제된 언론에 의해 남의 집, 불구경하듯 광주에 빨갱이들이 득실거리고, 폭도들이, 공비들이, 반공불순세력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라디오를 통해 제한된 사실들만을 들었다. 시민들은 다친 사람이 없고, 진압하는 군인들만 몇 명이 부상을 입고,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만이 있었다.
선생님들도 입을 닫아 버렸다. 그 당시 고립된 광주에서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한 채 국운(?)을 걱정하는 평범한 날들이 이어 졌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 더러 알 수 도 없었다.
사회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온 나에게도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과 귀가 없었는데 이제 고3인 딸아이가 슬프고도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마는 영화를 보는 내내 훌쩍였다.
내 아들 과 딸이 폭도로 몰려 진압군이 사정없이 휘두르는 몽둥이와 총질에 죽어 가는데 어느 부모인들 눈과 가슴이 제대로 있었겠는가, 친구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형제가 죽고, 아들이 죽고,....죽고, 또 죽고, 여기저기 나뒹구는 시체들과 피범벅이 된 사람들... 전남도청을 마지막 보루로 삼아 시민군과 진압군의 대치를 앞에 둔 상황에서 무겁게 흐르던 침묵, 그 날 밤안개 자욱한 숨죽인 광주에 울려 퍼지던 신애의 목소리, "우리는 마지막까지 싸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저희를... 저희를...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절규하며 영화는 막을 내렸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숙제를 우리 모두에게 남겨둔 채로.
정말 우리가 목숨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 있다고 서로가 죽임을 해야 했던 가, 한 사람의 욕심이 빚어낸 일그러진 영웅심, 그 눈먼 권력을 위해 무고한 소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어야 했던, 아픈 우리의 역사 앞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은 역사를 움직이는 영원한 생명력이 있다. 극도로 제한된 일부만 보여줬던 영화 속에서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상의 평범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피로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총칼보다 무서운 ‘사람’으로 맞섰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아픔, 그 아픔에 절규하는 영화 속 사람들이 바로 허구가 아닌 바로 우리 근대사의 단면이며, 내 가족의 이야기, 내 친구의 이야기, 내 이웃의 이야기로서 논픽션의 상황이었음에 더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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