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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의 향수

마음의 보석을 닦다

by 흥자 2004. 5. 1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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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의 향수.

 

향기가 난다.
담을 끼고 펼쳐지는 초록의 성 속에 숨어있던 하얀 찔레꽃이 꾹꾹 눌러쓴 열 여섯 순수의
비망록 같은 꽃잎을 살그머니 내밀고 있다.
추억의 몽당연필에 침을 묻혔다. 낯설고 어색한 인사말 대신, "느낌표"하나를 찍었다.
열 여섯의 느낌표!. 백 마디 말보다 감정이 하나의 부호로 표백된 느낌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사랑했던가, 뒷동산에 지천으로 머리풀고 있는 삐삐를 뽑던 일이 시들해 지고, 벌들
이 꿀을 따던 엉겅퀴와 뻐끔대를 찾아 헤매는 대신, 한 장의 노트를 찢어 머리를 맞대고 가
득가득 낙서를 했다.
그저 흘러버리고 싶은 이야기, 속상했던 것들, 숨기고 싶었던 것들, 우정, 사랑, 미움..., 말로
서 부끄러워 꺼낼 수 없는 마음의 언어를 적었다.
동그라미와 세모, 산 과 하늘과 별, 집 과 나무 와 꽃, 졸졸졸 흐르는 도랑물을 그리고, 알
수 없는 기호로 열 여섯 푸른 언어를 풀어내던 낙서,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이면 20년 뒤
의 자화상을 낙서장 속에 남겨두고 콧노래를 흥얼대며 사뿐사뿐 교정의 내리막길을 내려왔
다. 맹꽁이 신발 위에 뽀얀 흙먼지가 내려앉는 비포장 도로를 걸어 집으로 오다보면 어둠이
산 그림자 따라 슬금슬금 내려와서 발등을 적시고, 무논에 와글와글 울어대던 개구리 합창
소리가 사립문에 닿을 때까지 들렸다. 

 

사람의 성격과 정신상태를 반영한다는 낙서, 그리는 형상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그 속에 내
포된 함축된 심리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유연한 선의 흐름으로 일관했던 나의 낙서에
도 각박한 현실이 반영된 듯, 가로와 세로, 빗금과 여백으로 나만의 안전지대, 사각의 보호
막을 만들어 가는 낙서를 한다.
만들어진 공간 속에는 삶의 토양이 되고 씨앗이 되는 나침반 같은 언어와 찔레꽃 향기 묻어
나던 열 여섯, 순수한 언어로 채운다.
모내기를 하기 전 자운영꽃 가득한 논바닥에 앉아 꽃반지 만들고 목걸이 만들면서 듬성듬성
한 빈틈, 그 좁은 땅에도 낙서를 했다. 길 위에도, 나뭇잎 위에도, 틈만 나면 뾰족한 돌멩이
나 작은 막대기를 쥐고 무엇인가를 그렸다.
 운동장 귀퉁이 플라타너스 그늘에 친구들과 앉아서 좋아하는 그림과 낱말들을 "그리고", "
쓰기"를 반복했다.
붓끝으로 그리는 그림대신 마음으로 그리는 집,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앞으로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뜰에는 온갖 꽃들로 만발한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 용마루 틀어 올린
초가집 속에 제법 구체적인 살림살이를 채웠다.
양복을 입고 갓을 쓴 것과 같이 초가집과 어울리지 않게 안방에는 동화책 속에서만 보았던
침대를 놓고, 커다란 창문에는 레이스 달린 커튼을 치고, 정갈한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는
꿈을 그렸다.
꿈 과 현실과 미래가 엇박자 되는 미완성, 불완전 시기의 질풍노도와 같은 열 여섯의 자화
상, 구체적 대상이 없는 가족을 그려 넣어 형체도 모를 그리움을 담았다. 삶에서 정면으로
마주하던 눈부신 백색의 그리움, 어떤 모델을 그리려 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낙서장 빼곡
이 형체를 그렸다.

 

그리움이 강으로 흐른다.
가슴이 뛴다. 저수지 언덕 넘어 아카시아꽃 향기 가득한 좁은 길을 자전거 타고 오던 우체
부 아저씨의 빨간 가방 속에는 분홍빛 사연이 적힌 편지가 있을 것 같던 날들, 뽀얀 먼지
일으키며 운동장 밑을 돌아가던 낡은 버스에선 먼 곳으로부터 나를 찾아오는 반가운 얼굴이
있을 것 같았다.
등나무꽃 그늘에 날아들던 벌들의 분주한 날개 깃 부비는 소리를 들으며 무수히 많은 낙서
를 했다.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푸르던 날의 노트 속엔 꿈과 이상을 아우르며 그렸
던 동그란 모양의 낙서가 젊은 강을 건너면서 복잡한 획으로 변한다. 
가로와 세로의 획, 여러 줄의 가로와 세로로 나눔을 하고, 막힌 공간에 빗금을 치는 끝없이
이어지는 빗금의 낙서다. 되도록 반듯하게 가로를 긋고, 촘촘하고 좁은 세로를 놓는다. 그렇
게 만든 공간 속에 일정한 간격의 빗금을 채우고, 모서리가 맞물린 빗금으로 하나 건너 채
워진 공간이 한 칸의 여백을 두고 어긋난 계단을 이루도록 채운다.
칸칸이 벽을 쌓은 하나의 공간에는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욕구를 가차없이 차단하는 못을
박고, 남겨진 여백의 칸 속에 현실과 이상의 조우, 이성과 감성의 조우를 꿈꾸는 소망을 담
아 놓는다.
벽 속에 채워둔 빗금은 꿈꾸는 쾌락과 일탈에 대한 못질이며 빗금을 감싸는 벽은 세상을 향
해 쌓아 올린 보호 벽이다. 보아서는 안될 것을 차단하고, 듣지 말아야 할 소리들을 막아 주
는 방음벽이며, 세상에 넘쳐나는 오감을 마비시키는 것들, 삶에서 결별을 꾀하고 싶은 것들
에 대한 못질이다. 더 이상 보호막과 못질이 필요 없는 낙서, 열 여섯 마른 땅위에 그렸던,
삶의 여백이 흐르는 낙서로의 회귀를 꿈꾼다.
 비망록 속에 동그라미와 세모로 그려진 종달새 날개에 일상을 얹는다. 땅 위에 그려두었던
우물을 깊고 깊게 파서 사랑으로 길어 올린 시원한 물 한바가지 못질 당한 가슴에 뿌려준
다. 생명의 감로수가 되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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