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도 긴 단상(斷想)
노르스름한 감 꽃 위에 금빛 미소를 머금은 초하의 햇살이 잔잔히 부서지는 날.
생의 길목에서 인연의 고리로 묶인 아름다운 사람, 일과 문학과 이웃을 사랑하며 존재 의미를 터득한, 이 땅의 이세 교육을 걱정하는 현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가슴이 뛴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몸보다 마음이 급해 진다.
콩닥 이는 가슴을 다독이며 꿈의 실현, 생활을 바꾸는 속도를 체험할 수 있다는 KTX에 올랐다.
낯선 사람들, 삶의 방식과 생각과 연륜이 다른 이들이 하나의 공간에 등을 보며 앉았다. 레일 위에 펼쳐지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말끔한 창을 통하여 풍경화처럼 보여진다.
한밭 벌, 낯익은 도심의 소음과 빌딩이 사라지고 난 뒤, 넓은 벌판 가장 아름다운 나눔, 황금분할로 나누어진 들녘이 펼쳐진다.
곱사 등처럼 도드라진 밭 자락에는 바람에 몸져누운 보리이삭이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고, 황토로 분칠을 한 논바닥에는 이제 막 땅에 뿌리 내리려는 어린 벼 포기들이 비뚤비뚤 서 있다.
내가 가는지 네가 오는지 알 수 없는 길. 눈길 닿는 것 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며 스치는 풍경 속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그으며 이승과 고별식을 치르는 공동묘지의 무거운 모습이 아스라이 보여진다. 아카시아 향기 흩어지는 저 땅, 알지 못하는 많은 영혼들이 잠든 땅에 잠시 나를 뉘여 본다.
기차는 어둠과 빛을 교차하며 어느 지점을 지나는지 알 수 없이 앞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짙어지는 녹음의 물결을 지나고, 햇살 부서지는 호수를 지나며, 세 명의 나를 싣고 긴 터널을 지난다.
갑갑하다. 갑자기 달리던 기차가 이 어둠의 공간 속에 멈추어 버린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니 공포감이 몰려온다.
어둠은 평안한 안식과 공포를 가진 두 얼굴이다.
터널 속 어둠은 도깨비 같은 세상, 혼돈의 세상, 아비규환의 세상을 연상하게 하며
시속 300km로 4분간을 달려 경쾌한 차임벨 소리와 함께 광명 역과 눈부신 포옹을 했다. 비로소 처음으로 만나는 외부의 달디단 공기가 유입되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은빛 휘황한 건물이 영화 속에서 보았던 우주함선을 연상하게 한다. 소리를 차단한 방음벽으로 둘러 쌓인 제3의 도시 같은 역사에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다시 움직인다.
나선형의 유려하고 멋진 기차가 햇살에 윙크한번 하고는 다시 또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의 어둠을 만나고 다시 빛을 만나는 되풀이. 시계의 태엽처럼 감았다 싶으면 또 다시 풀려 버리는 잦은 어둠과 만나는 여행이다.
오월의 햇살에 그림처럼 뽀얗게 그려졌던 들녘 농로 길의 여유로움을 생각하고 있자니 기차는 어느새 낯선 도시의 풍경을 스치며 가벼운 흔들림으로 인사를 한다.
군상들이 오밀조밀 몰려 있고, 새집보다 견고하지 못한 둥지를 짖고 있는 타워크레인이 도심의 푯대처럼 서 있다. 성냥갑 같은 공간 속에 살아가는 새들, 아니 날개를 잃은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
기차가 한강 다리를 건넌다.
누군가는 생을 다짐하고 누군가는 버리는 곳, 흐르는 강물이야 그 모든 사연 알고 있겠지만 깊이 침묵하는 길을 지나 거미줄처럼 엮인 철로에서 속도를 늦추고 숨고르기를 한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철길에 일어났다 눕기를 반복하던 들풀들의 강인함, 유연함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처럼 시류의 바람에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야겠다는 소망하나 남겨둔 채 창 밖으로 보이던 52분간의 동영상은 로그아웃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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