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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雪景)에 취한 천태산.

인자요산(仁者樂山)

by 흥자 2004. 2. 2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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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雪景)에 취한 천태산.

 

가을의 초입에서 천둥과 번개로 막아서며 끝내는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아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돌려야했던 천태산을 두 계절이 공존하는 휴일 다시 한번 찾아갔다.
지난번에 찾았을 때 산의 옆모습을 보며 계곡으로 오르다가 끝내는 정상에 서지 못하고 자연의 경외감만 느끼고 내려와야 했던 서운함에 이번에는 영국사 절을 옆에 두고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로 했다.

 

들꽃과 단풍이 곱게 물든 작은 길을 따라 걸으니 고즈넉하고 아담한 산사를 품어 안고 있는 풍채 수려한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사 입구에는 육백년의 긴 시간을 온 몸으로 버티고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있다.
유구한 세월을 증명하듯 "가슴의 크기가 무려 11m이고, 하늘을 향해 솟은 높이가 31m, 사방으로 뻗은 가지의 넓이가 20미터"로 넓은 품만큼이나 큰 그늘을 가지고 있다고 안내되어 있다.
본(本) 나무에서 가지가 뻗고, 그 가지가 다시 뿌리를 내려 연리지가 이루어진 나무, 오랜 풍파 속에서 젊음을 유지하며 무수히 많은 열매들을 아직도 품고 서 있는 생명력에 경이로움이 더 했다.
한 땅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동안 변화무쌍한 역사의 아픔들을 나무는 밤새워 울면서 걱정해 주었다 한다.
나무도 제 뿌린 내린 곳의 앞날을 읽을 줄 아는 현명함이 있건만, 지금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읽어내고 국가를 위하여 눈물 흘리며 걱정해줄 한 그루 나무는 있는지 모르겠다.
가슴에는 많은 귀중한 보물들을 품고 있는 영국사 대웅전 앞에는 푸른 세월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단아한 삼층석탑(보물 533호)과, 원각국사비(보물 534호), 부도(보물 532호), 망탑봉 삼층석탑(보물 536호)등 조상의 숨결이 숨쉬고 있다.

 

정갈한 풍경을 옆에 두고 등산길에 접어들었다.
처음엔 완만한 길을 보여주더니만 중간중간 깎아지른 절벽으로 막아서 인간의 접근을 불허한다. 인간의 가장 낮은 자세로 암벽을 오르고 또 오른다.
낙엽 쌓인 정취도 느끼지 못할 만큼 가파른 절벽이 절망처럼 자꾸만 막아선다.
그럴 수록 인간의 욕망은 정복하고 싶은 것, 내재된 정복의 욕구가 솟구치고 자연 앞에서 그 교만함을 드러낸다.
이를 눈치라도 챈 것일까? 산의 팔부 능선쯤 올랐다.
무엇인가 나풀나풀 내리는 것 같더니만 이내 함박눈이 되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진다.
흰나비들의 군무(群舞)다.
바람을 타고 밑에서 위로 날아오르는 흰 눈송이들이 떡갈나무에도 쌓이고, 소나무가지에도 쌓이고, 단풍나무에도 쌓이고, 내 머리 위에도 소복이 쌓여진다.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발걸음은 둔탁해 진다.
멈출 수 없다. 이것을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 했던가?, 오르던 길에는 절벽이 많고, 바위가 많아서 도저히 되돌아 내려갈 수 없다.
신천지 설경이 펼쳐진 정상이다. 

설원의 세계에 도취됨도 잠깐, 뿌옇게 시야를 가리며 쏟아져 내리는 눈(雪)을 등에 업고 하산을 한다.
길은 미끄럽고 눈을 뜨고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는 멈추지 않고 얼굴을 때린다.
가을의 끝자락에 그리는 겨울 풍경화, 하얀 옷을 입은 나뭇가지에는 설화가 만발하다.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설경을 뒤에 두고 내려온 산 밑자락에는 가을이 수북히 쌓여 있다.
은행나무가 쏟아놓은 잎들과, 떨어져 젖어있는 은행알들이 아직은 가을이라고 이야기한다.
뒤를 돌아본다.
두 계절을 한 폭의 풍경화에 담아내는 천태산이 햇살 속에 신기루처럼 빛난다.
산사 처마 끝에 풍경이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내며 무사히 하산하였음을 반겨준다. 맑은 울림으로 오는 풍경소리와 대나무 푸른 잎새들이 바람에 몸을 비벼 연주하는 천상의 화음으로 마중을 한다. 

 

비워짐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고,
공명에서 그 맑은 소리를 울려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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