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피어있는 꽃
지난날을 반추 할 때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기억’과 ‘추억’이 아닐까 한다.
‘기억’과 ‘추억’, 그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체감 한다는 것은 생(生)의 나이테를 더해 간다는 것이다. 철지난 유물처럼 남아 있는 어느 한 순간을 만인이 공유하느냐, 나와 또 다른 누군가만이 간직할 수 있는냐에 따라 ‘기억’과 ‘추억’으로 정의 할 수 있다. 빛의 농도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처럼 기억의 퇴적층 속에 파묻힌 생의 편린들 속에는 다양한 ‘기억’ 과 ‘추억’이 존재 한다. 그 중 유독 하얀 박꽃으로 상징되는 너무도 고와서 슬픈 한 조각의 기억이 있다.
정지된 영사막 같은 한 낯의 햇살이 매미소리에 취해 버린 나뭇가지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골목길을 가득 메우던 아이들 소리와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골방에 누워 공허한 시선을 붙들고 있는 한 아이의 얼굴엔 송곳 같은 햇살이 꽂혀 눈이 시리다.
박속처럼 하얗기만 하던 그 애는 나보다 한 살 적은 외사촌 동생이었다. 그 애를 볼 수 있는 것은 엄마를 따라 밭에 가는 날이었다. 마을에서 외돌아진, 어미 소가 한가로이 되새김질을 하던 외양간이 있고, 높다란 댓돌이 마루처럼 놓여 있으며, 뒷문을 열면 산자락 풀잎들이 생끗 인사를 했었다. 까맣게 손때 절은 골방 문을 열면 옷자락에 묻어 온 바람 한 자락에도 히죽이 웃던 어린애가 누워 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그 애가 그렇게 된 것은 아비 때문이라고, 아니 늙은 구렁이의 저주가 내렸다고 수근 거렸고, 그런 수근거림 속에서 그 애는 자랐다.
건강하게 태어났던 아이, 몸도 잘 가누고, 손ㆍ발도 움직이고, 뒤집기도 했었는데 쇠꼴을 베던 아비의 낫질에 구렁이의 목이 잘렸다는 것이다. 목이 잘린 구렁이는 한길이나 솟아올라 선혈을 뿌리며 한나절을 몸부림치다 끝내는 죽었고, 그 후로 그 애는 일정한 시간만 되면 쉿~쉿 뱀 소리를 내며 혀를 날름거리고, 온 몸을 쥐어짜듯 비틀며 죽어간 구렁이의 흉내를 내며 시름시름 앓다가는 끝내 눕게 됐다는 것이다.
정말, 그래서였을 까, 너무도 하얘서 슬픈 아이, 문턱을 넘어 자연의 사소한 것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오직 얼굴 표정과 허공을 향한 헛손질, 가끔씩 질러대는 괴성, 모로 누울 수도 좌로 누울 수도 없는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며 악연의 질긴 끈을 붙잡고 있었다. 그 후로 아비는 술에 찌든 날이 많았고, 그런 날이면 “너 죽고 나 죽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신세 한탄을 해댔다. 환영받지 못하는 생, 그런 생이라 할지라도 세월은 비켜 가는 법이 없었다. 길가에 잡초같이 골방에 박혀있는 그에게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배달 됐다.
입학, 그것은 테두리를 확장하는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요, 앎에 대한 희열과 우정, 선의의 경쟁을 배우며 한 사람의 삶을 결정짓게 하는 출발점이다. 이런 축복이 가득한 입학의 환희를 맛 볼 수 없는 그 애가 너무 안쓰러웠던지 엄마가 장에 가서 내 신과 함께 그 애의 꽃신도 사왔다. 꽃신을 들고 숨차게 달려 그 애 집을 가던 날, 유난스레 하늘은 맑았고, 가을 끝자락을 지난 바람은 날카로웠다. 숨을 몰아쉬며 꽃신을 그 애 손에 쥐어 주었다. 야릇한 미소가 얼굴에 번지고, 맑은 눈은 허공을 더듬었다. 꽃신을 신고 문지방을 넘어 친구들과 어울려 들판을 쏘다니며 학교에 가는 한 마리 나비를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모른다.
꽃이 졌다.
바람에 분분히 흩어지는 꽃잎이 아닌 슬픔마저 삭혀 버린 하얀 통꽃. 어린 꽃잎을 땅속에 묻고 오던 어떤 봄날의 오후를 기억한다. 마당가에 지게를 벗어 놓으며 허공을 응시한 채 눈을 비벼대던 그 애의 아버지. 웃옷의 앞섶을 끌어 올려 하염없이 눈물을 찍어내던 그 애의 엄마. 시커먼 손등으로 무언가를 자꾸만 훔쳐내며 뾰족이 올라온 풀잎을 애꿎게 뜯어대던 그 애의 오빠. 어린 날의 영상 속에 박혀 있는 한 조각의 선명한 기억이다.
존재마저 잊어버렸다가 문득 운명의 장난에 사지가 뒤틀린 아이들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떠 오르는 아이. 아홉 살의 짧은 생을 살다간 그 애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싸 해진다.
아파트 화단에 박꽃이 피어 있다. 누런 줄기에는 푸른 조롱박 두어 개가 애처롭게 달려 있다. 손길이 미치지 않은 줄기는 어지럽게 널려 이리저리 비틀린 육신으로 인간 세상에 잠깐 피었다 저버린 그 애를 닮아 있다. “내 딸은 나의 신앙”이라던 장애를 가진 자식을 둔 어느 인사(人士)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신앙으로 존재 하지도 못한 채 떨어져버린 꽃, 열매로 맺지 못하고 짧은 생을 살다간 그 애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마는 유독 내 기억 속에 남아 존재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른다.
애잔한 슬픔으로 남아 있는 하얀 빛깔, 하얗다는 것은 상처가 있다는 것이다. 속살이 보이도록 베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상처는 깊을수록 하얗다는 것을. 딱지를 떼어 내고 아물어 버리는 상처는 흔적이다. 살면서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의미도 모르는 채 보았던 죽음, 그 영원한 별리는 아직도 아물지 않는 속살이다. 세상 많은 이별을 대하면서도 유독 하얗게 기억되는 아이. 부모의 가슴에 까만 씨 하나를 남기고 바람 앞에 날리는 꽃잎이 되었던 그 애를 아파트 화단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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