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채우기

아름다운 수(數)의 만남.

흥자 2004. 9. 5. 10:08

아름다운 수(數)의 만남.


나는 홀수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6년을 포함 학창시절 내내 홀수 반을 했고, 홀수 번호를 가졌었고,

홀수의 학번을 가졌으며, 무엇을 하든지 나의 결과는 홀수였다.

그러므로 홀수는 항상 나를 대표하는 숫자였다.
그래서 일까?, 짝수를 보면 좀 낯설고 뭔가 꼭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의 빈틈도 보여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완벽한 느낌이 싫다.

 

 짝수 속에는 공간이 없다.
공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그 무엇인가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 이기도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짝을 맞추기를 좋아한다. 특이나 재물을 모으는 차원에서는 더 채우려 하고

 하나의 모자람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아흔아홉을 가진 사람은 하나의 홀수를 더하여 일백 이라는 짝을 맞추기를 원한다.
이렇듯 짝수는 채움으로서 획을 긋는 수이며, 끝맺음의 수(數)이기도하다.
그렇다고 하여 짝의 수가 욕심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짝의 수는 완벽함을 추구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한 그 하나를 채우기 위해 연을 맺는수(數) 이기도하다.

그리하여 부부의 연, 자식과 형제 연, 스승과 제자 연, 친구의 연...수 없이 많은 연을 맺고 서로 등을 기대는 따뜻함의 수 이기도하다.
"너"와 "내가"가 만나서 "우리가" 되는 수로서 만남이 아름답게 조화된 수가 바로 짝 수이다.


반면에 홀수는 시작의 수다.
구분된 획 위에 새 출발을 하는 도전하는 수, 언제나 처음 이라는 설렘과 흥분
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분방함의 수이다.

코 찔찔 흘리며 호기심 하나로 시작된 학교 생활의 두려움과 낯설음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수였고, 사회에 첫발을 내 딛을 때에도 그렇고, 한 가정을 꾸릴 때에도 그렇고, 첫 아기를 낳았을 때에도.... 어설프면서도 꿈을 꾸게 하는 수, 그것이 바로 홀수이다.

또한 우쭐댐의 수기도 하다. 어느 곳에서고 두드러진 빛이 되며, 자랑하고 싶은 수 이기도하다.


홀수를 좋아한다.
내 삶의 처음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를 대표하는 수가 홀수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하찮은 자격증 시험을 볼 때도 끝자리 수가 홀수이어야 안심이 된다. 그리고 분명 좋은 결과를 거둘 것 같은 예감이 들고 또한 그 예감이 적중했다. 하물며 운전면허시험을 볼 때도 그랬다. 그러나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
가 살아가는 세상은 홀수만 가지고 살아지지 않으며 또한 짝수만 가지고 살아지지 않는다.


음(陰)과 양(陽)의 조화처럼 홀과 짝의 숫자가 서로 얽기�기 하나되어 살아가야 하는 현대는 숫자들의 세상이다.
짝과 홀은 반대의 개념이 아닌, 짝과 홀은 조화됨의 수다.
짝이 홀을 버리면 홀이 되고, 홀이 홀을 만나면 짝이 되듯, 그렇게 비우고, 채우며 우리의 삶 속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요즘은 은행이나 관공서 그 어디를 가든 숫자의 조합인 번호표를 받아들고 순서를 지키고, 볼일 보며, 차를 타거나, 길을 걷거나,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숫자와 연관되지 않고는 하루도 살아질 수 없는 숫자들의 세상 속을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더러는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아니 표현되어서도 안 되는 절대적 삶의 가치나, 도덕적 기준, 행복의 척도까지도 숫자로 표현되는 서글픈 현실을 본다.


산다는 것은 결코 그런 수치로 표현될 수 없으며, 사물을 보는 보편적 관점이나 가치관에 따라 행복 지수가 달라진다. 아름다운 짝과 홀의 만남에서처럼 "너"와 "내가" 합하여 "우리"가 되어 부족한 곳 채워주고, 넘치면 덜어내며 힘들 땐 서로 등 토닥여 주고, 손 잡아주는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차갑게 느껴지는 숫자들의 세상 속에서도 정이 흐르는 따뜻한 인간애로 현대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