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요산(仁者樂山)

침묵하는 산.

흥자 2004. 7. 10. 10:49

침묵하는 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뜻 모를 불안감이 일어 좌불안석 서성이고 있다. 장마비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를 증명이라
도 하듯 굵은 빗줄기를 와락 쏟아냈다가는 이내 멈춰지고, 가느다란 빗발이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왜 마음이 산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와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숨겨놓은 보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자꾸만 산으
로 향한다. 가느다랗던 빗줄기 마저 멈춰지고 희뿌옇게 햇살이 웃는 듯 보였다.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어 모자를 눌러쓰고 배낭에는 겉옷하나와, 지갑과 물병을 비닐 팩 속에 넣
고, 접이 우산하나를 넣어 집을 나섰다.

 

산으로 향하는 차장에 다시 내리기 시작하는 빗줄기들이 작은 물방울을 부딪히며 인사를 한
다. 차에서 내려 눈에 익숙한 길 모롱이에 접어들었다. 파란 솜털을 뽀송하게 달고 있는 탱
자나무와 측백나무로된 골프장 울타리에서 시원한 바람이 선풍기처럼 품어져 나온다. 평소
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이지만 날씨 탓인지 몇몇 사람들만 약수 물을 길어갈 뿐 산행을
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멀리 올려다보니 산 안개가 허리를 감고 있는 금수봉 봉우리가 운무에 쌓여 신비스럽다. 
몇 발자국을 걸었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는개 비는 내려지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적막한 숲만이 깊은숨을 쉴 뿐 아무도 없다. 혼자서 오르기에는 약간은 두려운 생각도 들어
작은 연못가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 속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떼지어 왔다 갔다 유영을 한
다. 불투명의 유리판 같은 못에는 산들이 한 폭의 유화를 그려내고 떨어지는 빗방울에 잔잔
한 동그란 파문이 인다. 번지는 파문에 생각이 흩어진다.
빗방울이 우산 위에 방울방울 맺히는 물기 가득한 산, 왜 나는 홀로 찾아 서 있는가,... 
혹시 누군가 와 주는 사람이 없는지, 짧은 산행이지만 길동무 해줄 벗이 있는지, 여기까지
왔는데 계곡의 물소리를 듣지 않고 돌아서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숲으로 한
발을 내 딛었다.

 

산이 침묵을 하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몸짓으로 말을 할뿐이다.
나뭇잎을 흔들어 물방울을 털고, 잎을 떨궈 무게를 덜어내며 존재의 의미를 온몸으로 보여
준다. 물에 젖은 거미줄에 낙엽 한 장 거꾸로 매달려 춤을 춘다. 산이 흔들리고 우주가 흔들
리는 모습을 본다. 물방울 조롱조롱 달고 있는 거미줄, 세상에 목을 매고 있는 우리네 삶 같
다. 몇 발자국 걷고 서성이고, 몇 발자국 걷고 눈감고, 몇 발자국 걷고 주위를 둘러보며 조
심조심 걷는다.
비가 잠깐 멈추어지자 숲의 주인들인 많은 생명체들이 산을 흔들며 울어댄다. 앙증맞게 달
음질치는 아기다람쥐의 모습에 무서움이 사라져 버렸다.
숲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온다. 흙 향과 풀 향이 어울린 숲에서 느낄 수 있는 이 촉촉함. 길
을 걷다 가만히 서서 눈을 감았다. 마른 바위틈을 지나가는 물소리가 낭랑히 들려 온다. 이
숲 어느 깊은 흙 가슴에 이토록  맑은 옥수를 담고 있다 토해내는가, 산의 심장에서 흘러나
온 물줄기가 작은 폭포를 만들며 나에게 소리를 치는 것 같다. 두런두런 사람의 소리가 들
리는 듯 하다. 아니 꾸짖는 듯도 하다.
땅위로 솟구친 물줄기가 내 안의 소리를 묻듯 세상의 소리를 묻어 버렸다. 소리를 묻어 버
린 폭포는 산의  심장을 타고 흘러 푸른 생명을 키워낸다.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기억조차
없던 돌멩이에 푸른 이끼들이 파릇파릇 살아 움직이고있다. 미약하기만 했던 다양하고 푸른 
생명의 존재들이 앞 다투어 제 빛을 낸다.
존재마저 느끼지 못했던 생명들을 깊은 잠에서 깨우며 흘러내리는 물이 언젠가는 바다에 이
를 것이다. 바다를 향해 가는 흘러가는 여정 길, 뭇 생명들을 키우며 산을 지나고, 들을 지
나고, 강을 건너 바다로 향하는 기나긴 흐름이 우리네 삶의 여정처럼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
을 것이라는 라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오르다 보니 성북동 삼거리다.  

 

빈 의자에 앉았다.
산이 침묵 한다, 나도 침묵 한다.
산은 무거움을 털려 침묵하고 난 할말이 많아 침묵을 한다.
젖은 의자에 비닐을 깔고 앉아 있으려니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산 안개가 신령스럽다. 뿌옇
고 촉촉한 느낌으로 와서 얼굴을 스치다가는 이내 사라지고 또 다시 올라오는 운무, 산허리
를 감고 흐르는 운무는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한다. 세상에 오직 혼자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 아무 것도 정의되지 않은 혼돈의 세상, 태초의 모습, 본능의 모습을 보는 듯한 피안의
세계에 놓여 있는 빈 의자. 가쁜 숨 몰아쉬며 올라온 쉼터에 언어의 칼날로 베어버린 쓰린
마음 내려놓는다. 살포시 올라오는 운무가 어머니의 깊은 마음처럼 촉촉한 느낌으로 등을
감싸 안아 준다.  

2004.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