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보석을 닦다

생각의 징검다리

흥자 2004. 6. 26. 09:13

생각의 징검다리


육교 위에서 자귀나무를 보고 있다. 하루동안 펼쳐 놓았던 일상을 접어들고 퇴근하는 시간
활짝 날개를 편 공작새 모양의 연분홍 화한(華翰)을 머리에 이고 첫날밤을 기다리는 신부
같은 발그레한 모습으로 건너편 길옆에서 환하게 웃고 서 있다.
길과 길을 이어주는 육교에서 집으로 향하던 발길 잠시 멈추고 질주하는 차량들을 무심히
본다. 신호등에 잠시 멈추었다가는 저마다의 목적지를 찾아 일제히 내달리는 풍경이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날렵하게 비행하는 모습 같다.
길에 양쪽으로 늘어선 하늘을 가리는 빌딩 숲 작은 모서리 공터엔 기우는 햇살을 받고 있는
진홍빛 접시꽃이 더 없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내 어머니의 소박한 웃음 같은 접시꽃에 시선은 정지되고 불현듯 일어나는 아련한 그리움은
육교를 건너 어스름 내리는 산골짝 밭 다락에 나를 세운다. 밭 울타리엔 따갑게 내래 쬐던
여름 햇살을 머리에 이고 장수의 갑옷처럼 겹겹이 옷을 입고 서 있던 옥수수가 통통하게 여
물어갔고, 알록달록한 강낭콩들이 꼬투리 속에서 자유를 꿈꾸던 구석진 곳에, 껑충하니 키
큰 접시꽃이 뻐꾸기 울음소리보다 더 곱게 웃고 있었다.
넙죽하니 배를 땅에 깔고 흠벅지게 누워있던 호박넝쿨에는 호롱불 닮은 호박꽃이 피어 있었
다. 하루 종일 땅을 일궈 김을 매던 어머님이 별빛을 이고 서야 굽혔던 허리를 펼 수 있었
던 밭 언저리, 질펀한 삶을 갈무리하듯 고단한 하루를 끝내며 머리에 감은 수건을 풀어내어
훌훌 털어 또아리 틀어 얹혀 놓고, 푸성귀 한 광주리 담아 이고 돌아오면 조랑조랑한 자식
같은 감자 몇 알 따라와 보리밥 위에 진주처럼 박히었다.
해 그림자 접고 내려오던 길가에는 발걸음 따라 별님과 반딧불이 불빛이 가득히 뿌려지고,
때늦은 후회를 한탄하듯 목청이 쉬어라 울어대던 개구리 울음소리는 앞마당까지 따라와 교
향악을 들려주던 집과, 마을과, 친구들이 아스라한 풍경 속에 되살아난다.


육교는 생활의 편리만을 가져다주지 않고 내 상념의 다리가 되어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 속
을 거닐며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시간의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을 했다.
세월의 흐름을 거슬러 추억의 터널을 놓아주고, 동과 서로 나뉘어지고, 남과 북으로 나뉘어
진 마을과 마을을 이어준다.
사람이 왕래함으로 생각을 나누고, 공동의 문화를 발달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육교, 하
늘을 날아오르는 것만큼이나 기상천외의 발상(發想)을 했던 길(道) 위에 길(道)을 만든 육교
를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인류 최초로 땅을 딛고 서서 걷기 시작한 직립 보행이 문명의 발달을 가져왔다면, 육교야말
로 획기적이고 입체적인 도심의 발달을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복잡한 도심과 한정되어진 땅 위에 하늘을 찌를 듯한 수직의 문명을 발달 시켰다. 그리하여
생활에 풍요를 선물하는데 기여하였지만, 길(道)위에 길(道)을 놓음으로 써 좁은 공간에 많
은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넉넉했던 우리네 마음자리는 설자
리를 잃고 자꾸만 각박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를 눕혀 누군가에게 길을 만들어 준다는 것.
직립으로 세워진 문명들 속에 가로로 눕는 생각의 발상이 우리 삶에 많은 변화 가져왔듯 나
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고슴도치 등위에 돋아난 가시 같은 마음의 탐욕을 눕혀야겠다.
늘 날카롭게만 자라는 생각들, 알 수 없는 미움과 불신으로 뻗어나는 올가미를 끊어 삶에
디딤돌을 만들면 밟아도 꿈틀대지 않고, 두들겨도 소리나지 않는 탄탄한 내 삶의 육교가 될
것이다.
늘 바닥에 만 누워있던 번잡한 생각들을 들어올려 마음의 육교 위에 펼쳐 놓으면 자질구레
한 일상사에 사로잡히지 않고 세상일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수 있을 것이다. 한길 높이에 올
려놓은 마음으로 베푸는 아량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밀려드는 차량들 밑에 깔려 신음하는 아
스팔트처럼 아프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도로 위에 중앙선이 지워지듯 중심을 잃
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삶, 그런 삶을 살아 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