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보석을 닦다

빗방울 소나타

흥자 2004. 6. 18. 16:47

빗방울 소나타

 

비가 내린다. 창가에 번지는 가로등 불빛에 유리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진주처럼
영롱하다. 어둠을 뚫고 대지(大地)를 세차게 두드리며 내리 쏟아내는 폭우에 내 사념의 창은
열리고, 열려진 틈 속으로 들어오는 생각들. 빗방울 떨어져 고인 곳에 작은 물방울 일고 물
방울은 하나의 돛단배가 되어 추억의 강기슭을 거슬러 오른다.


내 어릴 적 집은 검붉은 양철 지붕이었다. "하면 된다"던 새마을 운동의 구호 속에 뚝딱뚝
딱 망치소리와 함께 초가지붕을 벗겨냈다. 그리곤 찬란한 은빛 양철을 씌워 남루한 삶을 덧
칠하듯 색을 입힌 지붕 있었다. 한 여름 쏟아내는 강렬한 열기에 금새 달구어지는 양철 지
붕 위에 쏟아지던 소낙비는 때때로 적막 속에 쌓인 마을을 깨우는 장엄한 소나타를 연주했
다. 세찬 빗줄기를 타고 순간욕망의 날개를 펴고 거슬러 오른 미꾸라지가 마당 위에 뚝~뚝
떨어지던 신기함이 있고, 울타리 가에 만들어진 작은 도랑에서 풀잎 뜯어 소꿉놀이하고, 종
이배 만들어 띄우며 놀던 곳엔 내 유년의 시간이 흘렀다.


평소 바닥을 드러내던 도랑이 황톳물을 마을로 콸콸 쏟아내고 시퍼런 칼날을 번쩍이며 탐욕
스런 마음을 준엄하게 꾸짖던 소낙비가 쏟아지면 우리네 하교 길은 더 없이 즐거웠다. 우산
을 쓴다고 해도 온 몸이 흥건히 젖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것마저 준비되지 않은 우리들
은 커다란 감나무 밑에서 비를 피 하기도 하고, 더러는 나뭇가지 꺾어서 머리에 얹기도 하
고, 넓은 호박잎으로 고깔모자 만들어 쓰고 마냥 철벅이는 물신발로 걷다보면, 언제 그랬었
냐는 듯 햇살만 말끔했었다. 후줄근하게 젖은 몸으로 길 웅덩이에 고인 흙탕물에 발을 담그
며 철벅철벅 돌아 올 때면 먼 산으로 보이던 무지개의 아름다움과, 생끗 웃는 햇살에 유난
히 노랗게 보이던 호박꽃 과 우리들 인생살이만큼이나 질펀한 개망초 꽃이 흐드러지던 길이
었다.

자연은 생동감과 진정한 생명의 아름다운 실체를 유감없이 보여주었건만 내 아릿한 기억 속
여름날 풍경엔 큰언니 얼굴위로 소낙비처럼 흐르던 굵은 눈물 있다. 뜨거운 태양이 하얗게
부서지던 날, 갑작스레 하늘이 낮게 내려앉고, 바람을 앞세운 검은 구름이 서쪽 산을 넘어와
좌충우돌 힘 겨루기를 하는가 싶더니 마당 한가득 널려 있던 호밀 짚 위에 소낙비를 쏟아냈
다. 인삼농사를 짖던 우리에게 호밀 짚은 겨울에 덧 발을 엮어 햇볕 가리개로 쓰기 위해서
는 꼭 필요했던 재료다. 소낙비에 젖어 버리면 그 해는 덧 발을 엮지 못 하고 고스란히 비
용을 지불하고 구입해야만 했다. 그런 호밀 짚 이기에 비를 맞추지 않으려고 동분서주 헛간
으로 옮겼으나 비 설거지가 채 끝나기 전 무심하게 쏟아지던 빗줄기에 흠뻑 젖은 호밀 짚을
붙들고 엉~엉 울고 있던 언니의 그 해맑고 효심 가득한 눈물을 보았었다.


눈물과 추억이 엉클어진 비가 가로등 불빛에 사선을 그으며 세차게 쏟아진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 물방울은 골목으로 모이고, 모아진 물은 다시 들로 산으로 강으로 흘러 바다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인간의 우매함을 꾸짖는다. 때로는
비(雨)로, 바람(風)으로 눈(雪)으로. 한줄기 섬광이 번뜩 스쳐 지나 가며 순간 어둠을 살라버
린다. 천둥의 호령소리 또한 세상을 갈라 놓을 듯 커다란 울림으로 이 밤을 앓고 있다. 자연
은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으름장을 놓으며 인간의 우매(愚昧)함을 지켜보다 오만(傲慢)dl 극
에 달하면 묵시(默視)의 언어로 준엄한 질책의 칼날을 휘두른다. 그러나 때로는 외려 선량한
사람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자 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다. 정말로 질책을 받고 꾸짖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자연의 언어를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자연은 참으로 인간에게 겸허함
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어린 날 무지개를 쫓던 순수와,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알고 사람의
도리와 이치에 어긋 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준엄한 꾸짖음을 미리 읽어내는 지혜를 터
득할 것이다. 그리하여 고귀한 생명을 잃고, 집을 잃고, 논과 밭을 잃고 나서 땅을 치는 참
혹한 후회를 하지 않는 의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쉼 없이 돌아가는 시계바늘의 째깍거림처럼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 소리를 들으며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있는 불빛을 본다. 저 안에 누군가도 나처럼 세상사에 부대낀 상념하나 잠재
우면 어린 날 보았던 무지개 빛 희망과 아름다운 추억과 지나가 버린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
며 생각의 뒤안길을 돌아오고 있는 가 보다.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과 가
득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