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요산(仁者樂山)

산길에서의 사색.

흥자 2004. 6. 10. 19:18

산길에서의 사색.


길은 외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빈계산을 목적지로 하는 버스 중에서 평소에 경유하는 노선과 다른 버스를 택하여 올랐다.
익숙함에서 벗어난 약간은 낯선 풍경, 지나가는 아파트 담에 붉은 장미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기도 하고, 더러는 피어날 때 고운 모습과 달리 한잎 한잎 흩어지고 뭉크러진 모습으로
지고 있다. 지는 꽃잎을 보며 떠날 때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동
안 버스는 유성 오일장이 펼쳐진 포근한 풍경들을 지나간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마늘과,
고추 모와 잡다한 물건들, 많은 물건들만큼이나 인심 좋은 장터를 지나 버스 여러 대가 휴
식을 취하고 있는 종착지에 나를 내려놓았다.


골프장 탱자나무 울타리엔 대추알 만한 푸른 탱자가 초여름 햇살에 뽀송하게 살을 찌우고
있고, 멸균 봉지 속에서 뽀얀 꿈을 키우는 어린 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배나무들의 사열
을 받으며 밭 가운데를 지나 비에 씻기운 맑은 산들이 성큼 다가와 보이는 수통골 입구에
들어섰다.
좁은 도로를 확·포장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도심을 벗어난 맑은 산에서 들려오는 거칠은
기계음이 불협화음처럼 귀에 거슬린다.
조금 내린 비에도 한결 맑아진 계곡 물에는 물고기들이 자맥질을 하고 있다. 텅 빈 가슴을
드러낸 저수지를 지나 녹음이 우거져 그늘이 드리워진 산길로 들어섰다.
마른 계곡의 돌멩이들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 성북동 삼거리 나무 의자에 앉았다.
빈계산과 금수봉, 수통골이 만나는 삼각지, 아니 폐쇄된 하나의 등산로를 넘겨다보면서 가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다리 쉼을 하고 있는데 시끌벅적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빈계산
쪽에서 내려온다.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 속에서 강한 경상도 억양이 섞여 나오는 것을 보
면 이 지방 사람들은 아닌 듯 하다.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사람들, 자연의 소리에 귀를 닦지 않고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라디오
와 녹음기를 켜 놓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사람 하나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들
에게 내어 주고 빈계산 가파른 오르막을 올랐다. 누군가 설치해 놓은 안전선(밧줄)을 잡고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한발 한발 오르다 보니 빈계산 정상이다.

 

작은 돌탑들이 성처럼 쌓여 있는 곳, 쌓여진 돌멩이만큼이나 만은 소망들이 쌓여 있는 곳,
그 앞 바위에 앉았다. 더위를 식히고 쉬면서 생각해 본다. 친구란 어떤 존재일까? 하고.
친구란 두 신체에 깃 든 하나의 영혼이다 라는 말이 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존재, 그를 친구라 한다면 요즘 나와 늘 함께인 두통도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어느 날부터인지 내 안에 것들이 수천길 지하에서 용암이 끓듯 생각이 고이고 고여 있다가
머릿속을 톡톡 두드리며 작은 소리로 부르는 두통,  내 안에 존재하여 미워하기보다는 끌어
안고 사랑하며 달래야 하는 존재가 나를 친구라 부르며 늘 함께 하고있다.
무엇인가에 집중을 하다 보면 살그머니 사렸다가도 가만히 있으면 슬그머니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 신호를 보낸다. 더러는 큰 울림으로 보내기도 하고 더러는 아주 작은 울림으로
신호를 보내며 자꾸만 우정을 확인하려 한다. 지금도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휴대폰 전화의
진동처럼 울림이 온다. 아무래도 내 머릿속에는 자명종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깨
어나라고 잠재된 의식에서 깨어나라고 어서 새 집을 짖고 새 길을 가라고 한다. 인생 길에
는 만약이 없다고 어제나 현재 진행형만 있을 뿐이라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야
있겠지만 머리와 가슴이 시키는 대로 길을 가라 한다.

 

쉼을 거두고 일어서서 비교적 완만한 내리막길을 걷다가 학하동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에 걸터앉았다. 마을 골목을 돌아 맑은 숲을 올라 불어오는 바람이 더 없이 청량하다. 아름
다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논 다락들이 고즈넉한 산사 밑에 층층이 계단을 이루며 펼쳐져 있
다.
청설모 한 마리가 바스락 바스락 나뭇잎 밟는 소리를 내며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사람
들이 자주 찾는 산이다 보니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가 보다. 가지고온 간식을 나눠주었다. 
처음에는 멈칫거리더니 예민한 후각으로 찾아서는 덥석 물고 나뭇가지로 올라가 두발로 움
켜잡고는 앙증스럽게 먹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그렇게 앉아 푸른 숲과 마을을 내
려다보고 있었다. 

 

초여름의 열기를 식힌 바람이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아 그거였구나...,내 안에 존재하던 반갑지
않던 친구가 잠시 나를 놓아주었던 것이다.
가볍고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말끔해진 머리 와 가슴으로 내게 친구처럼 존재하던 두통과
는 작별을 했다. 얼굴을 보듬는 바람결에 훅하니 향기가 풍경 상쾌함을 더 한다. 풍겨오는
향기처럼 내 삶의 언저리에 있는 친구도 향기 나는 친구였음 좋겠다. 그리하여 인생길 같이
걸을 수 있는 그런 친구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