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밤.
어느 봄밤.
봄.
푸른 생명들로 충만한 초목의 물결이 눈길 닿는 곳마다 연초록 향연을 펼치는 아름다운 계
절, 사위는 어둠으로 가득한데 혼미한 꿈의 끄트머리를 찾지 못해 헤매던 의식이 부스스 잠
을 털고 일어났다.
식탁 위를 더듬어 물 한 모금으로 마른 목을 축이고 시간이 바람처럼 흐르는 창가에 섰다.
시선은 제 앞길을 비추며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을 쫓고 있다. 밝은 빛으로 다가왔다
사라지는 전조등 불빛이 원색과 농도를 달리하며 우리네 세상살이처럼 다양한 빛깔로 땅위
에 그림을 그리고 지나간다. 기다릴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이 평화의 시간, 뚜벅뚜
벅 정적을 깨트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의 긴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새벽까지 불을 밝혔던 아파트 창문에 불빛들도 하나 둘 잠들어 간다. 구름에 가려 희미하
게 보이던 별들과 붉은 가로등 불빛만 적요로운 이 밤을 지키고 있다.
생각을 비워둔 채 창가에 무심히 서 있자니 오싹한 기운이 들어 옷자락을 여미었다. 가로
등 불빛 속에 흔들리는 살구나무 잎새가 얼마 전 보았던 호숫가 물 그늘을 생각나게 한다.
휴일의 한가롭던 오후, 낚시를 좋아하는 형부의 부름을 받고 남편과 함께 기차길 옆에 위
치한 고즈넉한 낚시터에 갔었다.
간간이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의 심기를 건드리던 곳이다.
인생항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겉으론 평온한 듯 하지만 내면으로부터 이는 목마름과 갈증
에 시달리는 내 삶처럼 정중동의 세계가 펼쳐지던 곳, 수면의 고요함 속에 생생하고도 다양
한 물고기들의 삶, 인간이 일순간 던져놓은 미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생사가 엇갈리던
곳, 한길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없듯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에 찬연히 빛나던 햇살과, 언덕
배기 유난히도 많았던 할미꽃과, 식탐을 절제하지 못해 세상 밖으로 끌려나오던 물고기를
생각하게 했다.
순간 판단의 착오로 물위로 끌려나오며 푸른 물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한 줌 햇살에
반짝이던 은빛 비늘과 온몸으로 뻗대던 서글픈 공연이 끝나기 전 어망 속에 갇혀버린 물고
기, 푸드득 푸드득 살고 싶다 몸부림치던 가엾은 물고기를 생각한다.
유혹을 뿌리칠 용기도, 미끼를 뱉어낼 용기도, 어망을 뚫고 나갈 도전도 없이 지레 삶을
포기해 버린 물고기의 절망을 보며 나를 보는 듯 가슴이 아팠었다.
호수 밖의 아름다운 세상, 파란 하늘, 수면을 흔드는 바람의 손짓, 돋아나는 여린 잎새들,
지천으로 흐드러지던 꽃들의 향기에도 아랑곳없이, 숨을 할딱이며 죽어가던 물고기, 넓은 세
상을 향해 도전하려던 의지를 상실해 가는 내가 그 물고기는 아닌지...,
어망 속에 갇혀 있던 물고기를 들여다보다 살고자 몸부림치는 치어 한 마리를 호수에 도로
놓아주었었다. 갇힌 세상 속에서 나와 넓은 호수의 품속에 안기게 된 영문을 모르는 작은
물고기, 잠시 망설이더니 절망에서 벗어난 활기찬 몸짓으로 유연하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
을 시선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따라 갔었다.
희망과 절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희망은 성공을 확신하는 보증수표이며,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희망은 자기로부
터 오는 삶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호수 속으로 활기차게 미끄러져 들어가며 자축하던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통하여 배웠다.
지금 내 삶이 불확실한 미래의 벽에 부딪혀 혼미하나 미리 절망하지 않는다. 경포대의 일
출, 무한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맞이했던 신혼 첫날, 그 초심으로 돌아가련다. 그리하여 무언
가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위안을 삼으며 또 다시 찬란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깨어있는 새벽에.
생각의 골짜기를 돌아 나오는 동안 벌써 어둠은 옅어지고 흐릿했던 사물들이 서서히 윤곽
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정갈한 자아를 투시하듯 어둠을 가르는 바람이 싸르락싸르락 소리를 내며 아침을 몰고 온
다. 옷깃을 여미며 주위를 살펴보니 밤새 내 이야기를 들었던 베란다에 빨래가 뽀얗게 웃고
있다. 낚시터 길 모롱이에서 모셔와 작은 화분에 심어둔 할미꽃이 호수의 전설을 알고 있는
듯 수줍게 웃고 있다. 뽀사시한 솜털을 손끝으로 만져봤다. 비단처럼 보드라운 촉감 속에 청
정하면서도 슬픈 물고기의 사연이 묻어 난다.
창문을 채색하는 몽롱하고 아련한 햇살이 고개 숙인 검자주빛 꽃잎 위에 얹히며 꿈과 현실
이 만나는 각성의 아침을 열었다.
열린 아침은 희망을 실어 나르는 수레가 되고, 그 수레바퀴 위에 얹어진 하루를 뿌옇게 맞
이하며 내 삶에도 어둠 날리고 나면 가슴으로 안을 수 있는 희망이 밝아오리라 기대해 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