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요산(仁者樂山)

콩밭 매던 아낙네가 생각나는 산...칠갑산(七甲山).

흥자 2004. 2. 24. 17:49

콩밭 매던 아낙네가 생각나는 산...칠갑산(七甲山).

 

바람 끝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흐린 햇살이 낙엽 위에 안개처럼 깔리는 토요일이다.
큰 아이가 개별학습을 하는 날이라 하여 학교에 직접가지 않고 동아리 모임 활동을 하고 그
활동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함으로 토요일 수업을 대체하는 날이다.
느지막이 일어난 아이에게 함께 산행하자하니 동아리 모임에 가야한다고 걱정을 한다.
그럼 친구들에게 전화로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한 다음 함께 갈 친구 있음 같이
가자 했더니 얼른 친구들에게 전화를 한다.
친구 한 명이 함께 따라 가겠다 한다.
자유학습을 산행으로 대체하고자 권유했던 이유는 얼마 전 체육대회를 마치고 친구들과 마
음상하는 일이 있었다.
그로 입은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그렇게 세상을 배워가며, 우정도 깊어지며 성장해 가
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집보다는 넓은 자연과 함께 함이 더 좋을 듯 싶은 마음에서
였다.

 

오후 일찍 돌아와야 한다기에 주변에 가까운 산을 찾다 보니 근교에 있으면서도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산.
너무 멀고 험한 산을 택하면 아이들이 힘들까봐 비교적 가깝고도 낮은 칠갑산(七甲山)을 목
적지로 정하곤 딸아이와 딸아이 친구와 제 아빠와 함께 넷이서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서 길
을 나섰다.
도심을 벗어난 한적한 국도에 접어드니 금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뿌옇게 깔려지고, 제
몫을 다한 한 텅 빈 들녘의 풍경을 감상하며, 억새들의 흔들림이 햇살에 눈이 부신 길을 달
렸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칠갑산 휴게소에 발길을 멈췄다.
거리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는 향기는 그 어느 경치 좋고 음악 좋은 곳에서 마시는 차
한잔 보다 더 감미롭고 향긋하다.
느슨해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등산로에 발길을 옮겨놓는다.
떡갈나무 잎새와 상수리나무 잎새가 길 위에 쏟아져 발길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소
리를 낸다.
산중에 고속도로 같이 넓게 닦아진 산업도로를 따라 도란도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가에는 까치들이 제 목청을 돋우어 반갑다 인사를 하고, 어깨를 나란히 걷던 아이들
은 저 만치 뒤에 쳐져 힘들다며 거친 숨 토해내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진주
처럼 반짝인다.

 

이렇게 조금 오르다 보니 노래 가사 속에 존재하는 콩밭 매던 아낙네의 동상이 풍파에 절은
녹의(綠衣)를 걸치고, 머리에 수건 질끈 동여매고,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서 있다.
안내판에 칠갑산(七甲山) 유래가 적혀있어 발걸음 늦추고 눈으로 읽어본다.
"해발 561m의 칠갑산(七甲山)은 옛 백제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
천의식을 행하였으며,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甲자로 생
명의 시원(始源) 칠갑산(七甲山)이며, 또한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山)이라 해서
칠갑산(七甲山)이라 칭(稱)했단다.
성스러운 산으로 원래 칠악산(七岳山)이라는 명칭(名稱)을 가지고 있었다 쓰여져 있다."
이 안내판 맞은편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서 이 곳 청양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동상을 세워 거룩한 뜻을 기리는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산에 대한 유래와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시집가야 하는 딸의 애처로운 심정과 애절함이 담겨
있던 노래 가사를 생각해 본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눈물 아니면 기쁨으로 존재하는 어머니, 가난하던 시절 아이들을 굶
기지 않기 위해 모진 애를 썼던 어머니, 언제나 삶의 질곡을 무겁게 짊어진 가엾은 어깨와
머리에는 숙명처럼 얹혀졌던 머리수건을 두르고 계셨고, 흙과 가까이 사셨던 이 땅의 어머
니가 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갈한 풍경에 취하여 한 발짝 한 발짝 정상을 향하여 걷다가 잠깐 쉼을 가졌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고, 아이들과 흘린 땀을 식히고 풀어놓은 짐을 챙겨 넣고는 유난히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린아이 손목처럼 가녀린 나무들이 하늘을 빼곡이 가리고 있다.
산등성을 따라 계속 걷는 길은 솔 향기가 은은히 풍겨오고, 가을에 왔으면 더 좋았을걸 하
며 다 떨어져버린 단풍을 감상하지 못함이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거추장스런 옷 모두 벗고 제 모습 보여주는 나무들과 점점이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소나무들
과 아직도 미련처럼 잎이 남아 있는 나무들이 어울려 그려내는 풍경은 한 폭의 담채화 같
다.
완만한 경사도가 아이들과 함께 오르기에는 안성맞춤이라 생각하며 걷노라니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다 싶게 막바지 급경사가 산의 위력을 보여 준다.

 

땀을 흘리며 마지막 혼신을 다하여 정상에 오르고 보니 작은 비석하나 놓여 이 곳이
정상임을 표시하고, 넓적한 상석의 제단이 하나 놓여 있다.
작은 나무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한 숨을 돌리고 사방을 둘러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동양화 속에서 보았던 그런 풍경이다.
이 곳까지 땀흘리며 올라온 보람을 느낀다는 아이들이 찬사의 말, 정말 산 첩첩 이곳을 보
아도 산, 저곳을 보아도 겹겹인 산만 보인다.
하늘과 손잡고 운무(雲霧)를 어깨에 두른 산이 희미한 풍경을 그려낸다.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의 높이에 비하여 계곡이 무척이나 깊다.
정상에 오른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아이들과 함께 오른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먹을 것을 나누어준다.
힘들게 가져온 맛있는 음식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던가? 덤으로 기념사진 한 장 찰칵
하고, 아이들에게 보내줄 것을 약속하고 인사를 나누고 내려오는 길, 오를 때 미처 보지 못
했던 "반공호"를 보았다.

 

아이들이 너무도 신기해하며 저 것이 도대체 무엇 하는 곳인데 이 산 속 땅을 파고 저렇게
만들어 놓았는가 묻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 사라져 가는 반공호는 젊음을 파헤치고 이데올
로기의 아픈 가슴의 상처로 남아 있는 곳이다.
지금도 우린 그 이념에 칼질 당한 쓰라린 가슴 움켜쥐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분단의 아
픔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아이들은 이해를 못한다. 왜 반공호가 필요했는지를.
세대의 단절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도 엄연히 이념이 대치된 상태에 존재하고 있으면서 말
이다.
산을 파헤친 구덩이가 아닌 우리의 마음을 파헤친 아픔으로 오는 단어, 그 텅 비어버린 속
에는 아무 것에도 쓸모 없는 이념에 목숨을 낙엽처럼 날려버린 생(生)이 있다.
떨어져 쌓여있는 반공호 속의 낙엽이 왠지 젊은 날 이념에 묶여 누워버린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여 가슴한쪽 아릿함을 느끼며 칠갑산의 산행을 마쳤다.

 

오늘 이 산행에서 내 아이가 자연에 대한 겸허함과 아름다움과 역사의 아픈 상흔하나 기억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그리하여 무엇을 하든, 어떤 사람이 되든 겸손할 줄 알며,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과정에 충
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그루 한 그루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것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하나가 되어 학창시절을
아름답게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이
산행에서 느꼈으면 좋겠다.